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지마 전투 (문단 편집) === [[아버지의 깃발|이오지마의 깃발]] === [[파일:아버지의 깃발.jpg|width=100%]] >Holland, the raising of that flag on Suribachi means a Marine Corps for the next 500 years. >[[홀랜드 스미스|홀랜드]], 수리바치의 저 깃발은 '''해병대의 다음 500년'''을 의미하오. >---- >제임스 빈센트 포레스탈 해군 장관, 1945년 2월 23일[* 다만 이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닌 첫 번째 성조기를 내걸었을 때 이 말을 했다.] 누구나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사진이다. 미 해병대 소속 군인들이 이오지마에서 가장 높은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이다. 사진의 원 제목은 "[[https://en.wikipedia.org/wiki/Raising_the_Flag_on_Iwo_Jima|Raising the flag on Iwo jima]]"이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 포스터를 비롯하여 [[https://en.wikipedia.org/wiki/Marine_Corps_War_Memorial|미 해병대 전쟁 기념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곳에 석상으로도 만들어져 있다. 원래는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부중대장 해롤드 G. 쉬리어 중위가 3소대와 대대본부에서 차출한 소대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정상을 점령하여 더 작은 크기의 첫 번째 깃발을 먼저 세웠고, 후에 산 정상으로 보급물자를 전달하러 온 2소대의 1개 분대 병력이 좀 더 큰 두 번째 깃발을 세웠는데 사진 속 깃발이 그것이다. 맨 처음 세워진 깃발은 전투가 계속되다가 급하게 올리느라 좀 작은 깃발을 사용했다. 이 때의 사진도 남아 있는데 해병대 기관지 "레더넥"의 종군 카메라맨 루이스 R. 라워리 하사가 촬영했다. 이후 대대장 존슨 중령은 이 깃발을 대대 금고에 반납, 대대 소유물로 보관하고 "대신 더 큰 깃발을 달라!"라고 지시, [[진주만 공습]] 당시 격침된 함선에 있었던 성조기를 보관하고 있던 [[전차상륙함|LST]]에서 해병대원들이 꺼내와 두 번째로 깃발을 세우다가 사진이 촬영된 것. [[AP통신]] 소속 종군기자였던 조 로즌솔(Joseph John Rosenthal, 1911~2006)이 찍은 이 사진은 그해 [[퓰리처상/특종사진 부문|퓰리처 상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워낙 광원이나 구도가 완벽하고 역동적이라, 당시에도 로즌솔이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군인들에게 깃발 세우는 연출을 반복시켰다는 소문이 꽤나 나돌았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 같은 곳을 촬영한 영상이 있고 회고록과 증언 등이 나와 사라진 상태다. 이 두 가지 버전 사진 중에 두 번째 버전 필름이 먼저 미국으로 들어가 전국의 신문 1면에 실리게 되었다. 심지어 신문 1면을 보관하게 깃발 계양장면 사진이 접히지 않게 해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에, 배치를 바꾸어 다시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두 번째 버전의 사진의 구도가 워낙 완벽하여, 첫 번째 사진이 먼저 미국으로 들어 갔다고 해도 이 정도로 큰 방향이 있었을지 의문이 될 정도이다. 이후 이 사진은 미 해병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전후 미국 각지에 세워진 해병대 기념비들 역시 사진 속 장면을 본따 세워졌다. 그러다 2016년 미 해병대는 사진 속 인물들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약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기존에 알려진 내용을 정정했다. 깃발을 세운 인물들도 상황이 워낙 긴박하여 헷갈려 하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기억을 조합하여 진실을 찾게 되었다. 이 사진은 본국에 보내지자마자 잔악한 일본군을 상대로 미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상징이 되었고, 정치적 쇼맨십에 능했던 루즈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이 해병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맨해튼 프로젝트]] 등에 쓸 전시 국채 판매의 광고판으로 써먹으려 했으나, 송환 명령이 내려지기 전 앞서 말한 3명이 전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해병들만 본국으로 송환됐다. 이 기간 중 아이라 헤이즈 해병은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아이러니한 건 이 사람만 찐이고 브래들리와 개그넌은 사진 속 인물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두 번째 깃발을 올린 슐츠와 켈러는 이를 해병대 지휘계통을 통해 바로 잡으려다 해병대의 관료주의에 의해 묵살된 이후 공개적으로 진실회복을 위한 노력은 포기하고 주변에만 사실을 밝혔다.[* 사후 고인의 서류 속에서 당시 필립 H. 토리 소령이 사실을 묵살한 문건이 발견되었다.] 위 사진의 주인공들은 다음과 같다. 특이사항으로, 사진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최후가 좋지 못했다.'''[* 3명은 이어진 전투에서 전사했고 1명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나머지 2명은 비극적으로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사진의 진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주목 한 번 못 받고 사망했다.] || [[파일:external/www.iwojima.com/57mike.gif]] ||<|2>-1919년생,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슬로바키아) 출신.[* [[루신인]]이다. 본명은 미할 스트렌크(Михал Стренк).][br]-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2소대 소총분대장. 계급은 [[병장]][br]-원래 도로공사 인부였으나 1939년 미 해병대에 지원 입대. 쿠바 관타나모 해군기지 소총경비중대와 해병대 제1여단 7연대 3대대 본부중대, 패리스 아일랜드 신병 훈련교관(DI)으로 복무했고,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합중국 해병레이더스|제3레이더스대대]]에서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2소대의 소총분대장으로 복무 중이었다.[br]-1945년 3월 1일 이오지마에서 아군 함포의 오폭으로 전사[* 전에는 박격포를 맞고 전사했다고 했었으나 책에서는 아군의 오사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 || 마이크 스트랭크 || || [[파일:external/www.iwojima.com/hblock.jpg]] ||<|2>-1924년생 [[텍사스]]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부분대장, 계급은 상병.[br]-고등학교 미식축구선수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미 해병대에 징집되었다.(징집기수) 신병훈련 수료 후 해병대 공수부대에 지원,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 해병대 제3사단 제1공수연대 본부중대와 1공수연대 1대대 화기중대, 1대대 본부소대에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2소대 소총분대 부분대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br]-1945년 3월 1일 마이크 스트랭크가 전사하자 [[분대]] 지휘를 맡지만 그 역시 스트랭크가 전사한 지 수 시간 만에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전사.[*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위치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미국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해병대원을 자신의 아들로 한 눈에 바로 알아봤다고 한다. 정부에서 초기 발표시 다른 사람으로 발표했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18개월 후 의회 조사 결과 할런 블록 본인으로 밝혀졌다. 뒷 모습밖에 안 보이는 흑백사진인데도 알아보다니, 어머니의 안목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화이다.] || || 할런 블록 || || [[파일:external/www.iwojima.com/57sos1.gif]] ||<|2>-1925년생 [[켄터키]]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소총수, 계급은 일병.[br]-고등학교 졸업 후 냉장고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다 1944년 징집되었다.(징집기수)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E중대에 배치되어 1945년 3월 21일 이오지마 전투 당시 일본군 저격수의 총탄을 맞고 전사.|| || 프랭클린 수슬리 || || [[파일:external/www.iwojima.com/ihayes.jpg]] ||<|2>-1923년생 [[애리조나]] 출신. 스트랭크 분대의 소총수, 당시 계급은 일병(최종 계급은 상병)[br]-피마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건설현장 목수로 일하다, 1942년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징집되었다.(징집기수) 신병훈련 수료 후 해병대 공수부대에 지원, 해병 중의 해병이라는 미 해병대 제3사단 제1공수연대 3대대에 근무하다가 1944.1.8일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해병 중장의 해병대 내 엘리트 부대 해체 명령에 따라 28해병연대 E중대 2소대 소총분대 소총수로 복무 중이었다. 사진으로 인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전사한 군인들이라 말했다고 한다. "45명의 소대원 중 단지 5명만이 살아남고, 250명 중대원 중 27명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영웅이겠는가?" 또한, 그는 저 깃발이 꽂힌 날 상륙했으므로 역사적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몰라도 사진에 찍혔다고 영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은 그런데 관심이 없었고, 국채 판매고를 올리는 데만 열중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가게를 차려 주었으나. 그 대신 해병대 작업복을 입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가게는 말아먹고 이곳저곳을 방랑하다, 1955년 애리조나의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 || 아이라 헤이즈 || || [[파일:220px-Harold_Schultz.jpg|width=120]] ||<|2>-1925년 [[디트로이트]]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3소대, 계급은 일병(최종 계급은 상병)[br]-1943년 미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징집되었다.(징집기수) 28해병연대 E중대 3소대 소총분대로 자대 배치를 받아 소총수로 복무 중 이오지마 수바라치산 정상 전투에 참전하여 두 번째 깃발을 세웠지만,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6년 사진속 인물로 공식 판별되었다. 당시 정상에는 전투에 참가한 3소대 병력과 전투 후 물자를 보급하러 온 2소대의 1개 분대(스트랭크의 분대) 병력이 섞여 있었는데, 슐츠는 전투에 참가하여 첫 번째 깃발을 세운 3소대 병력이었고, 전투 후 도착한 2소대의 스트랭크 분대가 두 번째 깃발을 세울 때 그들을 도와 함께 깃발을 세웠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공개적으로 자신이 사진 속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가족 등 주변에만 진실을 밝혔다. 1995년 사망. 사진속 인물중 가장 오래 천수를 누렸으나, 자녀가 없어 기념해 줄 사람도 없다. || || 해럴드 슐츠 || || [[파일:Corporal_Harold_Pie_Keller.jpg|width=120]] ||<|2>-1921년 [[아이오와]]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3소대, 최종 계급은 상병[br]-이오지마 수바라치산 정상 전투에 참가하여 두 번째 깃발을 세웠지만,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9년 사진속 인물로 공식 판별되었다. 사후 고인의 유품 속 문건에 당시 해병대 지휘계통을 통해 두 번째 사진 속 인물이 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혔지만 당시 해병대 관료주의에 묻혀 이 주장이 묵살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는 이후 공개적인 문제 제기는 포기하고, 가족과 직장 동료 등 주변에게만 사실을 얘기했다. 1979년 사망. 그나마 뒤늦게 사실이 밝혀지면서 고향인 아이오와에서는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 해럴드 켈러 || || [[파일:external/www.iwojima.com/bradleynavy.jpg]] ||<|2>-1923년 [[위스콘신]] 출신,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2대대 E중대 3소대 [[의무병|의무]]부사관이었다. 계급은 해군 의무병장(PM2).[br] 고등학교 졸업 후 장의사로 일하다 1942년 해군에 징집되었다. 해군 의무병으로 오클랜드 해군병원에 근무하다가 해병대 28연대 E중대 3소대로 전입했다. 그는 이오지마 스리바치산 정상 전투에 참가하여 첫 번째 깃발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2016년까지 두 번째 깃발을 세우는 사진 속 인물로 오인되었다. 스리바치산 전투 이후 인명 구조 및 부상에 따른 공로로 해군 십자장을 받았다. 자신들이 영웅이라는 사람들 말에 그는 "우리들은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지 영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1994년 사망.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는 역사학자가 되어, 베스트 셀러이자 자기 아버지와 부대원들의 삶을 그린 저서 '아버지의 깃발'을 썼다. 사후 두 번째 성조기 게양 사진 속 인물이 아님이 밝혀져 말이 좀 나왔지만, 교전이 없었던 두 번째 게양 때가 아닌 '''도중 총격전도 벌어졌던 첫 번째 게양 때 현장에 있으며 전투를 겪었고 그와 별개로 이오지마 전투에서 영웅적인 행위를 해 해군 십자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란 사실이 변하진 않아''' 도덕적으로 문제되진 않았다. 아들이 이오지마 전투를 다시 세상에 알린 공적을 인정해서 흐지부지 넘어갔다. 제임스 브래들리도 아무 이의 없이 이를 인정했다. || || 존 브래들리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